2021년 11월 8일, 살레르니티나와의 경기에서 전반 31분경 골을 득점하며 임모빌레는 실비오 피올라가 세운 라치오 소속 최다 득점인 159골을 경신하며 라치오의 레전드로 남을 준비를 마치며 이제는 라치오가 아닌 세리에의 대표 공격수가 되었다.
그렇다면 실비오 피올라가 어떤 선수길래 78년간 라치오의 최다 득점자 자리를 공고하게 지키며 라치오, 아니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프로필
실비오 피올라 (Silvio Pioala)
1913년 9월 29일, 이탈리아 왕국 출생
포지션 : 스트라이커
신체 : 178cm 75kg
통산 기록
635경기 349골 (리그)
34경기 30골 (국가대표)
”1930-1940년대를 대표한 공격수,
그의 시작“
실비오 피올라는 1913년 9월 29일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인 실비오는 군복무 때 생긴 이름으로 그의 원래 이름은 조아키노 이탈로였다.
실비오 피올라는 프로 데뷔 전부터 두각을 드러냈는데, 제노아에서 열린 이탈리아 유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자신의 팀인 벨로세스를 우승으로 이끌며 당시 유망주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선보였다.
그 후 벨로세스는 프로 베르첼리로 합병되었고 실비오 피올라는 프로 벨리첼리 소속이 되어 1930년 2월 16일, 볼로냐를 상대로 세리에에 데뷔해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데뷔 시즌부터 기대하게 만들었으며, 그리고 다음 시즌인 1930-1931 시즌부터 득점력에 두각을 보이며 13골을 기록했다.
그다음 시즌에는 부상을 입은 뒤 40일 동안 쉴 것을 권유받았음에도 2주 뒤에 복귀해 동점골을 기록하는 등 당대의 비평가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승승장구한 그는 프로 베르첼리의 핵심 선수가 되어 이탈리아 국대 B에 뽑히는 등 어린 나이에 전성기를 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한 프로 베르첼리가 팀 동료들을 판매하고 자신을 남기려고 하자 그는 훈련을 거부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결국 베르첼리는 그의 이적을 허가하여 볼로냐 전을 끝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온 베르첼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가 프로 베르첼리에서 남긴 기록은 127경기 51골이었다.
프로 베르첼리에서 뛰었을 때 그가 10대 중후반의 나이었던걸 생각한다면 10대 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득점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범상치 않은 득점력을 보이던 소년,
라치오에 합류하다."
실비오 피올라는 정들었던 프로 베르첼리에서 떠나 1929년 지금의 세리에 A로 이름이 바뀐 이탈리아 리그에 참가한 SS 라치오에 1934년 합류했다.
피올라는 라치오에서의 데뷔전에서 골을 기록하며 라치오에 적응을 마쳐가던 그는 데뷔 첫 시즌 최종 성적으로 29경기 21골을 기록, 그다음 시즌에는 27경기 19골을 득점하며 팀 내 최다득점자가 되었으나 팀은 그에 못 미치는 성적인 1934-1935 시즌 5위, 1935-1936 시즌 7위를 기록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신 국가들과 이탈리아 팀들이 참여한 미트로파컵에도 나가지 못하며 체면을 구겼다.
라치오는 아쉬운 성적을 극복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지오반니 리카르디와 움베르토 부사니를, 비첸차에서 브루노 카마레세와 지오반니 코스타를 영입했다.
이렇게까지 노력했음에도 라치오에게는 운이 따라주지 않은 시즌이었는데, 위에 선수들을 데려와 공격까지 보강해 가며 우승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으나 당대 전성기를 구사 중이던 볼로냐에게 3점 차로 밀려 준우승을 해버렸으며 미트로파 컵에서는 페렌츠바로시에게 무너지며 준우승을 또 한 번 해버렸다.
하지만 피올라 본인에게는 준우승을 두 번이나 했음에도 28경기 21골로 리그 득점왕을 달성하며 본인이 이탈리아 내에서 정상급 공격수임을 다시 한번 더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영광은 팀과의 불화로 한순간에 사그라져버렸다.
1937-1938년 시즌 말, 훈련에 늦어 벌금을 부과받았는데 그는 이에 반발하며 수뇌부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로 인해 본인을 영입한 유제니오 구알디가 구단 내부의 불화로 인해 사임하는 등 팀이 혼란에 빠지며 이를 기점으로 팀의 성적은 하향세를 보이며 1940-1941년 시즌에는 14위를 기록, 강등팀이었던 15위 노바라를 골득실로 간신히 제치며 강등을 면하는 성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선수 본인도 팀이 하향세를 그리자 실력 또한 하향세를 그리며 1938-1939 시즌부터 시작해 1940-1941 시즌까지 10골을 넘기지 못하며 이탈리아 최고의 공격수란 타이틀에 흠집을 남겼다.
그러나, 1941-1942 시즌 다시 한 번 더 불꽃을 내뿜은 그는 18골을 기록하며 기량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1942-1943 시즌에는 21골을 기록, 득점왕에 올랐으며 그 이후 그는 라치오를 떠나며 최종기록으로 243경기 159골을 기록해 2021년 치로 임모빌레가 그의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라치오의 최다득점자 기록을 지키고 있었다.
“토리노로 떠난
비안코셀레스티의 영웅“
피올라는 정들었던 로마를 떠나 토리노 FC로 이적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세리에는 중단되어 알타 이탈리아 챔피언십에 참가했다.
피올라는 토리노에서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요절한 토리노의 최고 스타 마촐라와 로익의 서포트를 받으며 27골을 기록하며 세리에가 중단된 아쉬움을 달랬다.
그때 한 팀이 피올라를 노리고 있었는데 바로 토리노의 지역 라이벌인 유벤투스로, 유벤투스는 그에게 높은 이적료를 지불하고 데려오며 많은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유벤투스로 입성했다.
피올라는 높은 이적료로 유벤투스에 입성했음에도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본인의 전 소속팀이었던 토리노에게 밀리며 오랫동안 염원해 오던 리그 챔피언 자리를 또 놓치게 되었다.
“노바라로 떠난 노장”
그는 기량을 떨어져 더 이상 유벤투스에 남을 수 없었고 노바라의 계속된 설득 끝에 노바라로 이적하며 커리어의 말년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기량이 떨어졌음에도 세리에 B에서 30경기 16골을 기록해 팀을 세리에 A로 이끌었다.
세리에 A로 복귀한 피올라는 마흔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임에도 노바라의 주포로 활약하며 마지막으로 불태우며 당시 세리에에서 40살 6개월 9일의 나이로 최고령 득점자 기록까지 세워 노장의 면모를 보여주며 1954년 3월 7일 아탈란타 전을 끝으로 은퇴하며 라치오의 상징적인 공격수이자 이탈리아의 상징이었던 그는 커리어를 마무리지었다.
“아주리의 주포“
실비아 피올라는 1935년 3월 24일 오스트시아와의 경기에서 한 골을 기록하며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데뷔를 마쳤다.
그리고 피올라는 1938년 월드컵에서 5골을 기록하며 득점왕 2위에 올랐는데, 그는 헝가리와 치른 월드컵 결승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헝가리의 우승을 저지하고 조국인 이탈리아의 우승으로 이끈 공신이 되었다.
1938년 월드컵 우승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국제대항전이 중단되었고 전쟁 기간 동안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 동안 중단되어 한동안 이탈리아의 국기를 달고 뛰지 못했으나 전쟁이 끝난 이후 다시금 국대로 활약했으며 1940년부터 1947년까지 국가대표 주장을 맡았다.
그의 국가대표팀 최종 기록은 34경기 30골로 축구에는 IF란 없지만 2차 세계대전이란 큰 변수가 없었다면 더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않았을까란 기대감이 남는다.
“플레이스타일”
피올라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이탈리아를 대표한 공격수답게 뛰어난 득점력을 보유하고 있다.
피올라는 최전방 공격수로는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빠른 스피드와 힘, 위치선정 그리고 수준급의 마무리 능력까지 보유한 최고의 공격수로 특히 그의 신체능력을 이용한 바이시클 킥과 같은 역동적인 킥들은 당시 모든 이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피올라는 기술적 완성도, 시야 그리고 연계 능력까지 좋아 최전방 공격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그 외의 자리에서도 뛸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결론”
실비오 피올라는 완벽에 가까운 공격수로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활약한 이탈리아의 간판 공격수였다.
그 시대에선 볼 수 없는 유연성을 이용한 역동적인 플레이는 그의 활약을 더욱더 빛내주었고 그 결과를 보답받듯이 실비오 피올라는 현재까지도 세리에의 최다 득점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또한 그가 뛰었던 프로 베르첼리와 노바라는 그의 이름을 경기장 이름에 붙혔을 정도로 그의 시작과 마무리 모두 빛이 났음을 알 수 있다.
글쓴이 : 다민 (추크알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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